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펠리페 5세 (문단 편집) === 두 번째 왕비, 이사벨 파르네제 === || [[파일:Felipe_V_e_Isabel_de_Farnesio.jpg|width=600]] || || 펠리페 5세와 이사벨 파르네제. 루이 미셸 반 루(Louis-Michel van Loo) 작, 1743년[* 이사벨 왕비가 중앙에 더 가깝게 위치해 있으며 펠리페 5세보다 더 크고 당당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그녀가 스페인의 실질적 지배자였음에 기인한다. 다만 이 초상화의 이사벨은 상당히 미화한것인데 이때의 이사벨은 지나친 식탐으로 인해 비만이 심해진 상황이었다.] || 펠리페 5세는 마리아 루이사와 사별하고 이사벨 파르네제와 [[1714년]] [[12월 24일]]에 재혼했다. 이사벨이 펠리페의 새 왕비로 간택된 데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다분했다. 이사벨은 명장 [[알레산드로 파르네제]]의 직계 후손이자 파르마 공국의 상속녀였다. 펠리페가 이사벨과 결혼하여 얻은 자식에게 파르마를 물려주는 것이 스페인의 계획이었다. 이를 통해 스페인은 이탈리아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이사벨은 [[카를로스 2세|선왕]]의 후처의 이종조카였고, 이모처럼 국민들에게 평판이 나빴다. 스페인에 도착한 이사벨은 곧바로 위르생 공비를 해임시키면서 자신이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드러냈다. 새 왕비는 펠리페 5세를 완전히 독차지했고 그가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사벨은 그의 성적인 요구들을 일종의 통제 수단이자 거래 수단으로 이용해 왕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이사벨의 거부는 펠리페 5세의 분노를 자극했다. 펠리페 5세는 소리 지르고 위협했으며 때로는 이보다 더 심했다. 이사벨은 끝까지 입장을 고수하고, 울고, 간혹 자신을 변호했다. 그렇게 해서 이사벨은 펠리페 5세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사벨 파르네제는 옷을 차려 입는데 걸리는 20분 외에는 왕이 눈 앞에서 멀어지지 않게 함으로써 자신의 주도권을 확실히 했다. 펠리페 5세는 30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이사벨은 심지어 펠리페 5세가 사냥을 나갈 때도 남자 옷을 입고 동행했으며, 1719년의 군사 원정[* 사국 동맹 전쟁으로 펠리페 5세의 위트레흐트 조약 위반으로 인해 영국-오스트리아-프랑스 동맹으로 싸우는데 프랑스는 같은 편인지라 꽤나 소극적이었고 지휘관인 제임스 피츠제임스(알만사의 지휘관이자 프랑스 군 장군이자 부르봉-스페인군 사령관인 그 사람 맞다.) 역시 프랑스 귀족(피츠 제임스 공작)겸 스페인 귀족이고(후손이 알바 공작) 아들이 스페인에 있는지라 마음이 그리 없었다.]때도 함께 했다. 이사벨은 백성들한테는 전혀 인기가 없었지만 남편에겐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이후 이사벨은 펠리페 5세가 사망할 때까지 스페인의 실질적(De Facto) 통치자로 군림했다. 상냥한 마리아 루이사가 매우 사랑받은 것과는 달리, 이사벨은 권력욕이 강하고 사치스러운 성격인터라 사랑스럽지 않은 여성이었고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사랑받지 못한 왕비였다. 이사벨이 스페인으로 와서 처음 마드리드에 들어왔을 무렵, 혹자는 자신의 글에서 그녀가 "22살 된 착한 여성으로 상당히 못생기고 시시하며 버터랑 파르마 치즈를 엄청 많이 먹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곧 스페인 신하들과 백성들은 이사벨이 상냥했던 마리아 루이사 왕비 소생의 왕자들에게 아주 못된 새어머니라고 단언하게 되었다.[* 실제로도 이사벨은 루이사 소생의 왕자들을 견제하고 박대하여 관계가 나빴다. 왕세자인 페르난도는 이사벨한테 하도 시달려서 펠리페 5세가 죽고 나서 국왕으로 즉위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자신이 싫어하는 계모 이사벨과 그녀의 자식들의 직위와 권한을 박탈하고 궁전에서 추방한 것이다. 특히 이사벨은 신하들을 매수하여 페르난도의 즉위를 방해했고 대놓고 페르난도를 모욕하고 다녔기에 페르난도는 그녀에 대한 원한이 많이 쌓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페르난도는 이사벨을 붙잡아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궁전에 감금시키고는 사실상 감옥 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사실 페르난도는 마음 같아선 자신을 핍박한 이사벨을 죽여버리고 싶지만 처형할 수 있는 명분이 없었기에 감금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사벨의 인망이 워낙 나쁜 터라 페르난도가 그녀를 핍박하는 것을 스페인에서는 모두가 기뻐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사벨은 12년 동안 라 그란하 데 산 일데폰소 궁전에 감금당했는데 그것도 페르난도가 죽고 자신의 아들 카를로스가 왕으로 즉위해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이사벨 소생의 아들들은 스페인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있었는데, 이는 전 왕비 소생의 아들 중 성인이 될 때까지 성장한 아들이 [[페르난도 6세|하나]]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이탈리아 영토를 전부 잃은 상태였고, 이사벨 파르네제의 목표는 자기 소생의 아이들을 위해 그 땅들을 되찾는 것[*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는 로렌 공국을, 스페인 이탈리아 남부를 얻고 파르마를 오스트리아에게 빼앗겼지만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 수복했다.]이었다. 이사벨은 자기 아들들을 위해 작지만 독립되어 있는 나라들을 요구하였고, 오래지 않아 이사벨 왕비는 자신의 장남인 [[카를로스 3세]]에게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 이후 스페인 왕이 되면서 7대조 [[카를로스 1세]]처럼 자신의 큰아들 [[카를로스 4세]]에게는 스페인을, 작은아들 [[페르디난도 1세|페르난도]]에게는 이탈리아 남부를 물려주었다. 여기서부터 부르봉-양시칠리아가 시작된다. 참고로 이 지방들은 1860년 [[이탈리아 통일|리소르지멘토]] 당시 [[주세페 가리발디]]에 의해 [[사보이아 가문]]의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병된다.]을, 차남에겐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국을[* 펠리페 데 보르본-파르마. 부르봉파르마 계의 시조다.] 얻어주었고 삼남은 장차 톨레도 대주교[* 루이스 데 보르본. 가장 어린 추기경 왕자(cardinal-infante)로 친촌 백작 작위를 받는다. 이후 작은고조할아버지인 [[페르난도 데 아우스트리아]]처럼 환속이후 페르난도가 장군이 된 것과는 대조적으로(뇌르틀링겐 전투의 승리)귀천상혼을 한다. 루이스의 딸인 마리아 테레사는 고도이의 아내가 되었다. 물론 고도이는 카를로스 4세의 왕비 마리아 루이사와 불륜관계였기 때문에 부부는 쇼윈도 부부였다.]가 될 것이었다. 이사벨은 총신들의 규칙대로 지배했는데 그중 제일은 [[이탈리아인]]인 줄리오 알베로니로, 그는 이사벨을 왕에게 추천했었던 사람이다. 이사벨 파르네제와의 자녀는 다음과 같다.(만 나이 기준) * [[카를로스 3세|카를로스]] : [[1716년]] [[1월 20일]] ~ [[1788년]] [[12월 14일]] : 72세 * [[마리아나 빅토리아]] : [[1718년]] [[3월 31일]] ~ [[1781년]] [[1월 15일]] : 62세 포르투갈 국왕 [[주제 1세]]의 왕비이다. 원래는 사촌인 [[루이 15세]]의 약혼자로서, 어린 나이에 프랑스로 보내져서 베르사유에서 생활하였으나 파혼당했다. 이후에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지내다가, 오빠인 [[페르난도 6세]]가 포르투갈의 공주인 바르바라와 결혼하고,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바르바라의 동생인 주제 1세와 결혼하게 되었다. * [[필리포 1세(파르마)|파르마 공작 펠리페(필리포 1세)]] : [[1720년]] [[3월 15일]] ~ [[1765년]] [[7월 18일]] : 45세 부르봉-파르마 가의 시조이다. *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 [[1726년]] [[6월 11일]] ~ [[1746년]] [[7월 22일]] : 20세 프랑스 왕태자 [[루이 페르디낭]]의 첫번째 아내이다. 루이 15세와 언니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혼담이 파혼으로 끝나자 프랑스와 스페인 양국간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이에 부르봉 왕가의 단결을 위해 새로운 혼담이 필요했는데, 루이 15세의 맏딸 엘리자베트와 마리아 테레사의 오빠인 파르마 공작 펠리페가 결혼하고, 루이 15세의 후계자인 루이 페르디낭과 마리아 테레사가 혼인하게 되어 부르봉 가문의 동맹이 재확인되었다. 딸인 마리 테레즈를 낳고 산후욕으로 사망했다. * 루이스 : [[1727년]] [[7월 25일]] ~ [[1785년]] [[8월 7일]] : 58세 원래는 [[톨레도]] 대주교가 되기로 결정되었어서 성직자의 길을 걸었으나, 성직자가 적성에 맞지 않아 결국 그만두기로 했다. 카를로스 3세는 동생이 성직자로서 자신에게 도움을 주길 원했으나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다니 못마땅했는데, 그 와중에 루이스는 귀천상혼을 하려했다. 카를로스 3세는 루이스를 설득도 하고 협박도 했으나 루이스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루이스를 호적에서 파버렸다. 카를로스 3세는 모든 문서에서 루이스를 언급할 때 부르봉의 성을 빼라고 명령했으며, 다시는 궁정에 발을 들여서는 안되며, 결혼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부르봉의 성을 쓸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루이스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카를로스 3세는 루이스가 죽자 후일의 곤란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두 딸들을 수도원에 수녀로 만들었다. 카를로스 4세가 즉위하고 왕비인 마리아 루이사와 총리대신 고도이 간에 불륜이 시작되었고, 이 불륜을 감추기 위해 고도이를 수녀원에 있던 루이스의 딸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시켰다. * 마리아 안토니에타 : [[1729년]] [[11월 17일]] ~ [[1785년]] [[9월 19일]] : 55세 [[사르데냐 왕국]]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왕비이다. 총 12명의 자녀를 출산했는데, 그 중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3]][[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명]][[카를로 펠리체|이]] 사르데냐 국왕으로 즉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